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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지문 연구 역사

도시라솔파미래도 2022. 3. 27. 10:37

문헌에 의하면 인류가 사람의 손가락에 여러 가지 문양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을 입증하는 자료가 고대 유물에서 고고학자들에 의해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기원전 8~7만 년에 프랑스나 스페인의 동굴 벽화에 기록된 손바닥 문형, 앗시리아 시대의 토지매매에 쓰인 문서,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암벽에 기록한 손 조각(지문, 장문 묘사) 등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이 어떠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다분히 종교적인 의식으로 사용되었거나 주술을 나타내려고 한 기억화의 도구로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어떤 경우에는 상업적인 계약서나 각종문서의 성격을 표현하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던 것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문이 사람을 구분하기 위한 개인 식별의 도구로 쓰인 최초의 기록은 앗시리아 시대로 추정됩니다.

 

동양에서는 고대 중국에서 가장 먼저 사용하였는데, 2천년 전에 중국 사람들은 어떤 기호나 손도장으로 지문을 이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워싱턴에 있는 스미스소니안 연구소에는 기원전 중국에서 만들어진 점토에 새겨진 지문 인상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 점토에는 육안으로 융선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지문이 찍혀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경주에서 신라시대 유물을 발굴하던 중 기마상 파편에 지문이 찍혀 있는 것을 발굴한 적이 있습니다.

 

최초의 지문 연구와 그 과정

최초로 지문을 학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영국의 Nehemiah Grew 박사입니다. 당시 Grew 박사는 영국 중 1684년 영국 학사회에 제출한 땀구멍과 표피융기선의 배치에 관한 논문에서 지문과 장문의 피부 문양 묘사도를 그렸습니다.

 

1685년 G. Bidleo는 인체 해부학에 관한 저서에서 무지(엄지손가락)를 해부학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Bidleo의 지문 묘사도 에서는 융선폭이 실제보다 다소 크게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은 융선에 대한 표면의 특징을 다소 과장하여 표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1686년 이탈리아의 Bologna 대학 해부학 교수였던 Marcello Malpighi 박사가 수장면은 여러가지 형태의 융선을 가지고 있는데 만약 현미경으로 검사한다면 그 융선 중앙에 땀구멍이 열려있는 것이 보인다라는 내용의 연구 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1751년 독일의 Christian J. Hintze는 저서에서 수족피부마찰면에 이랑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고, 1764년 Bernard S, Albinus는 유두상 돌기에 관한 문제를 발표하였습니다. 1788년 독일인 J. C. A. Mayer는 저서에서 각종 지문의 묘사도와 함께 두 사람의 피부 융선 배치는 결코 같은 것은 없다고 최초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19세기는 지문과학의 기초가 확립된 시대로서 19세기 전반기는 지문에 관한 이론적 기초를 중심으로 후반기에는 지문의 실용화를 중심으로 발전하였습니다.

 

1812년 Prochaska가 발표한 논문에서 유두상 돌기에 관한 내용을 언급한 바 있고, 1814년 라이프치히 대학의 Johann Friedrich Schroter가 발표한 저서에서 피부 구조를 그림으로 이해하도록 나타내고 있는데 특히 수지의 융선 부분에 색채를 넣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823년 체코슬로바키아의 Johannes Evangelist purkinje은 그의 박사 청구 논문으로 지문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그는 논문에서 최초로 지문을 9가지로 분류하고 명칭을 붙인 다음에 각각 설명하였고, 지문을 분류하는 원칙을 제시하였으나 아깝게도 연구의 결과는 당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였지만 나중에 갈톤과 헨리에 의해서 지문 연구자들의 지침으로 인정되었습니다.

 

1824년 영궁의 저명한 작가이며 디자이너인 Thomas Bewick는 자신의 지문을 목조 하여 저서의 앞뒤에 찍어 장식으로 사용하였으며, 1833년 해부학자인 벨은 창조물에 나타난 정신력, 지, 선이라는 논집에 수록된 손의 기능과 명확한 문양으로서의 중요한 자료라는 논문에서 손에 대한 구조적, 기능적 적응 분석을 시도하여 지단의 완전성과 탄력성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독일의 Herman Welcker는 1856년에 자신의 오른손 장문을 찍은 후 40년 후인 1897년에 다시 장문을 찍어 지문이 종생불변이라는 것을 실제로 입증하였습니다.

 

Henry. P. de. Forest는 지문에 관한 자신의 저서 말미 장식에 사용할 목적으로 지문을 찍었는데, 이는 Bewick가 지문의 조각을 만든 때부터 약 25년 후의 일입니다.

 

1867년 Alix가 자연 과학 연감 제5집 '동물편'에서 사람이나 원숭이 수족의 유두상 돌기선에 대하여 설명하였으며, 1877년 프랑스의 수의사 Audert은 화학적 지문현출 방법으로 질산은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시도하였는데 현재에도 잠재지문 현출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법으로서 이것이 지문 현출에서 최초의 화학적 시도였습니다.

 

1880년 독인 베를린의 수의사 Wilhelm Eber는 시 위생 관리로서 자주 도살장을 출입하던 중 정육점 수건에 묻은 혈액지문에 흥미를 갖고 유심히 관찰한 결과 그는 지문의 흔적을 검사하여 어떤 고용인이 어떤 수건을 사용하였는지를 알아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현장 지문에 의한 범죄자 감식의 특성을 인정하도록 정부에 제안한 이후 1885년 5월에 재차 지문을 범죄자 감식에 사용할 것을 제안하면서 보고서와 함께 약품, 확대경, 알코올램프, 필터지 및 기타 필수품을 포함하는 잠재지문 현출 도구 일체를 제안하였는데 이때의 잠재지문 검출 도구 중에는 요오드 및 요오드 가스 발생기가 포함되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입니다.

 

또한 자신의 저서에서 잠재지문의 검출방법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현재의 잠재지문 현출 방법과 비교하여도 아무 손색이 없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Eber의 제안은 정부의 거절로 채택되지는 못했습니다.

 

1882년 미국의 지질학자 Gildert Thopson은 군 측량 반장으로 재직 중 부하들과 종군 상인들에게 지불 증서에 지문을 찍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문의 개별성을 이용했다는 것보다는 금액을 고치는 것을 방지할 목적으로 이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1883년 독일 함브르크의 Arthar Kollman 박사는 유두상 돌기선의 발생학에 관한 책을 발간하여 다른 학자와의 사이에 열띤 논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Wiliam J. Herschel은 1853년부터 1873년까지 영국 정부 직원으로 인도에서 근무하던 중 지문의 실용성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동기는 Herschel이 영국의 식민지 관리로서 샹쿠풀의 도로 건설에 필요한 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입찰을 하여 그 결과에 따라 인도인과 계약을 체결하였으나 당시 인도는 영국의 식민통치하에 있었으므로 인도인이 영국인을 속이는 것은 그들의 종교적 의무로 생각할 정도로 영국 관리들과 어떠한 서약이나 약속도 지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Herschel은 인도인들에게 사기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계약서상에 계약자의 장문을 찍도록 한 결과 이 방법은 예상외로 많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에 그는 장문을 찍는 방법을 개선하여 손가락 말절만을 찍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최초로 지문을 찍은 사람이 코나이라는 사람인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현대 지문법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또한 뱅갈주의 Hooghiy 지역에서 근무할 떄는 연금 수령자가 허위로 연금을 수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연금수령 자격자 전원의 지문을 등록시킨 다음 연금을 수령할 때 영수증에 지문을 날인하도록 하여 등록카드의 지문과 대조 후에 연금을 지급하였습니다. 이 방법은 장기간 당국을 괴롭히던 문제를 일시에 해소시킬 수 있을 만큼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Herschel은 또 다른 지방 형무소에서 지문 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이 방법은 새로 형무소에 들어오는 범죄자의 지문을 채취하여 보관하고 있다가 경찰이 범죄자를 체포할 때에 즉시 감식하는 시스템으로서 지문 채취할 때 시지(둘째 손가락)와 중지(셋째 손가락)만을 채취하여도 충분히 피부 문양의 영속성을 입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충분한 실험을 거쳐 뱅갈 지방 전역에 지문 제도를 도입하도록 뱅갈 형무소장에게 청원서한을 제출하였습니다.

 

Herschel의 지문법은 두 손가락만을 채취하여 분류 방법 없이 대조하는 것으로 당시까지만 해도 이렇게 지문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운용되었던 사례가 없었던 점으로 보아 훌륭한 평가를 받을 만 하였습니다. 이러한 Herschel의 청원서 내용은 영국 과학 잡지 내이처지에 발표되었습니다.(1880년 11월호)

 

Henry Faulds는 1874년 5월 5일 기독교 단체의 일원으로 일본에 파견되어 당시 동경 축지 지방에 있던 외국인 거주 지역 내의 축지 병원에서 외과의사로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때 일본인들이 문서나 증서에 지장을 찍는 습관이 있는 것에 흥미를 갖고 있습니다. 또 가끔 선사시대 패총에서 발굴된 유물 가운데 토기나 부드러운 점토에 지문이 찍혀 있는 것에 관심을 갖고 피부 문양의 특수성에 관한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Faulds는 인류학적 측면에서 사람의 지문과 원숭이의 지문에 대해서도 비교 관찰하였습니다. 그는 또 지문 연구를 개론에 그치지 않고 현장 지문에 의한 범인 확정에 실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도 연구하였는데 이러한 연구 결과를 영국의 과학지인 내이처지(1880년 10월호)에 논문으로 발표하였습니다.

 

지문 분류법의 탄생

영국인 Francis Galton은 피부의 해부학적 기술에 의한 개인 감식 분야에 큰 공로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진화론을 제창한 과학자 다윈의 동색으로 1884년에 켐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1886년 런던에서 인류학 연구소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는 내이처지에 발표된 Herschel과 Faulds의 지문 감식에 관한 연구 논문을 높게 평가하여 자신의 정공 분야인 인류학과 관련이 있는 피부 문양의 인종적 특징과 유전적 유사성에 대하여 연구하였는데 그 결과 지문을 이용하여 개인 식별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고, 지문이 개인 식별에 유효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피부 문양은 종생불변(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이 가능한가 하는 불변성, 각자의 지문은 충분히 개별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부동성, 지문 채취 재료의 분류과 보관에 관한 문제 등 세 가지의 요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또한 Galton은 1892년 최초의 지문에 관한 저서 '지문'을 발행하였으며 지문을 분류하고 보관하는 실제적인 방법을 고안해 냈는데 이러한 분류방법은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1893년 영국 정부에서는 Galton의 연구 보고서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를 거쳐 1894년 2월 12일부터 개인 식별에 지문법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Edward Richard Henry는 Herschel의 후임 인도 관리로 부임하여 Herschel과 Galton의 연구 내용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지문 분류법을 고안하여 1899년 발표한 것을 1901년 1월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방에서 처음으로 Henry 식 분류법을 정식으로 채택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영국, 미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사용하고 있는 지문 제도의 효시로서,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지문 제도는 Henry 식 분류법에 약간의 변형을 가한 것에 불과합니다.

 

1891년에는 Argentina의 Joan Vucetich에 의하여 Vucetich 지문 분류법이 개발되었는데 이 방법은 오늘날 중남미 국가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1903년 독일의 Hamburg 경시청에 근무하던 Rocher은 함부르그식(일명 로져식) 분류법을 창안하였는데 이 분류법은 일본, 중국과 함께 우리나라에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지문이 공식적으로 채택된 것은 1902년 12월 19일 뉴욕 고시위원회의 수석 의무 시험관으로 있던 H. P de Forest 박사가 공무원 지원자 전원에게 지문을 찍도록 함으로서 처음 채택되게 되었습니다.

 

1904년 Missouri주에서 개최된 세계 박람회에 대비하여 미국 경찰 여러 명이 영궁의 형사 탐정 본부 지문국 소속의 John Kenneth Ferrier로부터 지문법을 배워 미국 전 지역에 지문법을 전파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습니다. 미 육군에서는 1905년, 해군을 1907년, 해병대는 1908년에 각각 지문제도를 채택하였고, 경찰국으로는 1904년 Missouri주에서 처음으로 지문제도를 채택하였습니다.

 

이렇게 외국의 지문 연국 역사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모든 학문은 서서히 발전하여 실생활에 응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 회사나 관공서에 출입시 지문을 활용하는 것과 범인 검거에서 지문을 활용하는 것 등 다양한 방면으로 지문이 활용되고 있는데요, 앞으로도 이 분야에 대한 연구와 개척을 통해 좀 더 미래지향적인 쓰임새를 가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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