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과 중동의 직업에 따른 전염병의 전염 방식 4
정식 의사들은 질병이란 사람이 지니고 있는 네 가지 체액의 불균형에서 비롯된다고 갈레노스로부터 배웠습니다. 네 가지 체액은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네 가지 원소, 즉, 불, 흙, 공기, 물에 해당하는 것이고, 그것은 다시 뜨겁고, 차고, 마르고, 축축한 네 가지 성질을 가진다는 것이었죠.
다른 가능성에 대한 고려 없이 오직 열병이라고만 간주된 페스트 전염병의 경우, 갈레노스의 이론을 따르는 정식 의사들은 이 질병이 심장을 질식하게 할 정도로 열이 뜨거워진 현상으로 생각했습니다. 또한 정식 의사들은 대우주와 소우주 사이를 연결하는 것은 공기이므로, 병의 원인은 나쁜 공기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학자들이 갖는 의학적 패러다임은 질병의 보편적 개념이었습니다. 비비안 누톤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하나의 질병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개인의 특수한 체질과 연관되는, 정상 상태로부터의 이탈에서 발생한다. 질병의 성질은 각 개인의 기질, 기관의 구조, 물리적 또는 심리적 작용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고, 그 기능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
누톤의 글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개업의들은 자신의 주된 사회적 소임이, 환자들에게 적절한 식사와 환경을 마련하고 여타 후천적인 요인들을 조절해서 환자를 보살피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돌보는 기능은 환자의 생활 습관에 대한 꼼꼼한 주의를 필요로 했고, 환자가 준수해야 할 적절한 섭생법을 마련해주어야 했을 겁니다.
이것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적지 않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지주들(영주나 성직자, 귀족들), 부르주아 계급 상층부의 부유한 은행가나 상인들이 주요 고객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라곤 왕국과 북부 이탈리아, 그리고 1436년 이후에는 독일 제국의 많은 도시에서 의사들을 고용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게 했지만, 의사들은 이러한 일이 정식 의료 경력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1576년에 한 이탈리아 의사가 기록한 것처럼, 의사들의 눈에 비친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의 외양은 '더럽고 불결한 체액이 넘쳐흐르는 혐오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페스트가 최초로 발생하기 전 30년 동안 피렌체 지방에서 의사로 활동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무면허'였습니다.
16세기 중엽, 정식 의사들이 병을 치료하는데 얼마나 무능력했는지를 바르치라는 의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의료라는 것은 올바른 원리와 규칙이 정해져 있다... 만약 치료가 잘못되더라도, 의료의 원리나 규칙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의사들이 실수를 저질렀거나, 치료가 어려울 정도로 병이 심한 경우였을 수 있다. 또한 환자들이 처방대로 행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약제사들이 잘못할 경우도 많다.'
1656~1657년에 로마의 보건 담당 장관이었던 가스탈디 추기경은 200년간의 유럽 역사에 대해 서술하면서 의사들에 대한 불쾌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실제 의료 행위를 경험해보면, 정식 의사들의 치료가 쓸모없고, 오히려 병을 더 악화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코흐 이후의 관점에서 볼 때, 당시 대학에서 훈련을 받은 의사들이 전염병 퇴치에 많은 관심을 쏟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사실, 그들은 전염병 퇴치를 위해 의사라는 직업을 택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간에 페스트가 유럽 인구의 1/3을 앗아간 이후 반세기 동안, 의학과에 지원한 학생 수는 14세기 초반 40년 동안의 수와 거의 같은 수준이었으니까요.
문자를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대학에서 베풀어지는 의학 지식이 전혀 없던 대다수의 사람들 가운데는 병과 죽음을 일으키는 원인이 다름 아닌, 악마나 방황하는 영혼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에 농촌 지역이던 룩셈부르크와 프랑스의 마시프셍트랑 지역에서 농부들은 인간과 동물을 지배하는 초자연적인 힘이 건강을 주기도 하고 병을 주기도 한다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관념 속에서 초자연적인 힘은 마을의 조화와 부조화, 외부와의 접촉 등에 의해 작용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벼룩이 잘 달라붙는 모직물 대신 가죽옷을 입고, 외부와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행상인들이 전염병을 옮기기 전까지는 전염병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농부들이 전염병이 도는 지역에서 오는 이방인들을 거부한 사례는 여러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리옹에 전염병이 발생한 후인 1628년, 리옹의 부유한 부르주아들은 종종 그러했듯이 그들의 소유지가 있는 시골 지역으로 도피했습니다. 하지만 일반 서민들이 리옹을 떠나 시골 지역에 들어오려고 하자, 마을 농부들은 돌을 던지며 그들을 쫓아냈죠.
그다음 해에 프로방스 지역의 농부들은, 전염병이 번진 디뉴 지역 사람들이 자기들이 사는 마을로 피난해 와서 생존을 위협한다면, 디뉴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농부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전염병을 막는 매우 안전한 방법, 즉, 사람들의 이동을 차단하는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죠. 하지만 농부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지닌 이탈리아의 도시 엘리트 계급이나 유럽 엘리트 계급은 전염병을 막는 것 이상의 제거하는 방법을 찾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출처 : 전염병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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