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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7년에서 1844년, 서유럽과 중동의 직업에 따른 전염병의 전염 방식1

도시라솔파미래도 2021. 10. 20. 19:34

서유럽과 중동의 직업에 따른 전염병의 전염 방식 1

처음 전염병이 발생한 시기에 유럽 도시의 반자율적인 권력자들은 전염병에 대해 아무런 공식적인 조치를 하지 않거나, 그저 일반 질병에 대처했던 방식으로 대응했습니다.

이렇게 대응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가장 발전한 지역일지라도, 이를테면 이탈리아 북부와 이베리아 반도의 무역도시들은 129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공중 보건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탈리아의 도시 통치자들은 공중 보건을 공공의 이익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가짐으로, 히포크라테스나 갈레노스 같은 고대 의학자들이 병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설명한 여섯 가지 비자연적 요소에 대한 학설을 새롭게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의 학설 중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공기를 포함하는, 중세 사람들이 소위 '기후'라고 불렀던 것인데 이것이 오늘날에는 사회 심리적 환경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분명 14세기의 전문가들은 오염된 공기가 병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 다른 비자연적인 요소는 우울증을 의미하는 '영혼의 고통'이었다. 중세 학자들이 고대 이교도 철학자들이 쓴 글을 기독교적 계시와 연관시킬 때 사용하는 논리학적 방법을 사용했다면, 그러한 '영혼의 고통'은 도시 국가의 공간이 오염됨으로써 발생한 건강의 악화를 의미했습니다.

 

만일 스콜라 논리학의 또 다른 방법을 사용한다면, 한 공동체 전체가 신을 모독한 소수에 대해 신의 분노를 증명하는 신의 화살을 맞은 것으로 볼 수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학문적 이해를 바탕으로 북부 이탈리아나 아라곤 지방의 도시 통치자들은 이미 1347년 이전부터, 그리고 전염병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인플루엔자, 열병, 또는 다른 여러 가지 질병으로 위기 상황이 발생할 때는 언제나 긴급 조치를 시행했습니다.

 

이러한 위생 정책 때문에 푸줏간 앞에 버려진 채 썩어가는 고기 찌꺼기들이나 가죽 업자들이 길에 내버린 가죽 조각과 폐수들, 문 앞에 버린 대변과 그 밖의 악취를 풍기는 모든 것들이 수거되어 도시 밖에서 처리되었습니다. 질병의 위기가 심각한 때는 창녀들이나 도덕적으로 지탄받는 사람들 또한 도시 밖으로 쫓겨날 수 있었죠.

 

세속적인 도시적 사고의 최전선에 있던 피렌체나 시에나와 같은 토스카나 지방의 도시들에서는 1347~1348년에 전염병이 발발하자 바로 위에 서술된 새로운 방식으로 질병에 대처했습니다. 통치자의 명령에 의해 거리는 깨끗하게 치워졌고,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와 썩어가는 고기들이 신속하게 땅속에 파묻혔습니다.

 

이전이라면 성직자들이 전염병에 대해 예전의 방식으로 위기 대처를 주장할 경우, 공동체의 대표자들은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서 속죄 행진에 참여하라는 지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게다가 전염병의 위기 국면이 심각한 상황으로 여겨지면, 신의 노여움을 불러일으킨다고 여겨지는 비정상적인 삶을 사는 모든 사람들은 추방당하기까지 했습니다.

 

1348년, 피렌체에서는 일시적인 전염병 예방 활동을 감독하는 보건청이 설립되긴 했지만, 이후의 전염병 발생 기간 동안에는 더 이상 설립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도시에는 보건청을 지원하고 이끌 수 있는 충분한 수의 관료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들 자신의 사적인 경고 체계 속에서 피렌체의 지도층 500여 가구 대부분은 전염병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알려진 지역으로 이주했습니다. 전염병이 떠돈다는 소문이 돌면, 피렌체뿐 아니라 유럽 어느 곳에서도 '최대한 빨리 최대한 멀리 도망치고, 최대한 늦게 되돌아오라'라는 명령이 유럽 유한계급들의 보편적인 대응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도망을 치면서도 피렌체의 권력층은 뒤에 남은 일반 시민들이 도시를 지배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마음속에 담고 있었고, 아마도 이러한 두려움은 실제로 현실화되었던 것 같습니다.

 

1378년 여름, 피렌체의 엘리트 계급이 당파 싸움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힘이 약화되었을 때, 반항적인 목공들이 몇 개월 동안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그 후 엘리트 계급은 이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는데, 특히 1383년 전염병 발생 기간 동안의 상황이 그러했죠.

 

1378년 치옴파 봉기 기념일인 7월 22일에, 피렌체의 기능공들은 혁명적인 슬로건을 외치면서 도시 전역을 휩쓸었습니다. 봉기를 일으킨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고문을 당하고 교수형에 처해졌지만, 당시 진행 중에 있던 문화적 르네상스의 측면에서는 한편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역사가인 마르치오네 스테파니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어떤 시민도 전염병을 이유로 도시를 떠날 수 없도록 하는 여러 가지 법률이 제정되었다. 권력층은 대다수 민중들이 도시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저항 세력이 민중과 결합해서 봉기를 일으킬 가능성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민중들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민중들은 언제나 크고 강력한 힘을 지닌 야수처럼, 울타리를 부수고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출처 : 전염병의 역사